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역사 (문단 편집) == 실업 시절 == LIG손해보험[* 이하 LIG, 2005년 이전에는 금성사, 금성통신, 럭키금성, LG화재 등 과거 럭키금성-LG그룹의 여러 자회사들이 운영해 왔으나, LG그룹에서 LIG그룹이 계열 분리되고 지역연고 홈앤드어웨이 리그 방식으로 바뀌며 현재의 팀명을 쓰고 있다. 다만 LIG그룹의 모체인 LIG손해보험은 LG에서 분리된 뒤에도 한동안 LG화재라는 이름을 유지해 왔다. 현재는 LG도, LIG와 연관이 없는 KB금융그룹 산하 스포츠팀이 되었지만 본문에는 범LG가의 역사를 다루기에 예전 일화를 옛 이름(2006~2015)인 LIG라는 명칭으로 통일해 기재함을 알린다.]의 창단일은 1976년 6월 24일로,[* '''공교롭게도 KB손해보험으로 다시 창단한 날짜도''' (2015년) '''[[6월 24일]]이다!'''] 당시 금성사배구단이라는 이름으로 창단했다. 전신은 철도국-체신부 배구단으로 1970년대 후반 당시 공공기관·공기업이 운영하던 체육팀을 인수하여 재창단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재창단을 한 다른 사례로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가 있다. 현대건설의 전신은 [[한국산업은행]] 여자배구단이었다.] 어쨌든 당시만 해도 꽤 많은 회사들이 실업배구구단을 창설했는데 몇 년 못가서 해체 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다가 럭키금성그룹이 배구단을 창설하면서 실업배구계의 민영팀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한다. 창단 이래 체신부 감독이던 조배호 감독의 지휘 하에 3~4년 사이에 종합선수권, 실업연맹전을 포함한 6개의 대회를 우승하고 각종 스타플레이어들을 입단시키는 등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하나 싶었는데 현재 배구 팬들이 떠올리는 LIG 특유의 '''맨날 당하기만 하는 이미지'''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그 시기에 입단한 선수중에 [[김호철]] 전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캐피탈]] 감독과 [[강만수(배구)|강만수]] 전 [[서울 우리카드 위비|우리카드]] 감독도 있다. 다들 2, 3년 동안 활동하며 많은 우승컵을 안겨줬다. 그러나 현재 배구팬들은 [[김호철]] 감독과 강만수 감독을 [[현대자동차]]의 레전드로 생각하지 LG화재의 레전드로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김호철 감독은 [[이탈리아]]에 진출한 후 [[대한민국]]에 복귀할 때도 친정팀인 LG화재가 아니라 [[현대자동차]]로 돌아왔으며,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 배구계의 위기 상황때도 LG화재가 아닌 현대캐피탈---과 IBK기업은행---을 선택했다(…). 창단 직후 곧바로 맞은 전성기도 1980년대 들어 곧 끝나게 되는데, 바로 [[고려증권 배구단]]의 창단과 20년 넘게 지속된 악연의 라이벌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 배구단]][* 물론 현대캐피탈 팬들은 LG화재/LIG - KB를 라이벌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동안 쌓아놓은 업적 자체가 넘사벽이라...]의 창단이 그것이다. 이 시기 들어 강두태가 고군분투했으나 [[고려증권 배구단|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의 등장으로 LG화재는 예전처럼 우승컵을 차지하는 건 힘들어졌고 [[한양대학교|한양대]]를 위시한 대학배구팀의 저항도 거셌다. 게다가 선수 수급문제마저 돈을 앞세운 현대자동차에게 완벽히 밀려버렸다. 강두태 은퇴 후 서남원과 이상렬, 최영준 등이 팀을 이끌어가며 1991년 슈퍼리그에서 실업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챔피언전에서 LG화재마저 꺾어버리고 우승을 차지한 [[한양대학교]]의 우승 주역 멤버 하종화, 윤종일, 강성형, 문양훈을 현대자동차에서 모두 싹쓸이 스카웃해가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더욱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싹슬이로 현대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구단에선 현대자동차에 항의하는 일까지 벌여졌고, 협회의 중재안으로 LG화재는 윤종일을 데려올수 있었으나, 4인방 전원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는지 거절하게 된다. 물론 이건 LG화재의 삽질 중 하나.][* 그리고 1991-92 대통령배(슈퍼리그의 전신) 대회 상무 우승의 주역 중 하나였던 센터 유병종을 입대 전의 태도 불성실을 이유로 복귀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어지간한 스타 플레이어들이 대학을 거치면 현대자동차에 입단해서 스카웃 전쟁에서 패배한 LG화재는 고등학교 때부터 잠재력있는 선수들을 선택, 장학금 등을 지원해가며 대학 졸업 후 LG화재로 입단하게끔 스카웃 전략을 바꿨고 LG화재의 목표는 바로 [[김세진]], 권순찬, 김기중이었다. 사실 권순찬과 김기중은 그렇다 쳐도 [[김세진]]은 다들 알다시피 역대급에 해당하는 공격수였고, [[한양대학교]]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세진]]의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학 최고의 센터였던 구준회, [[후인정]]과 더불어 [[경기대학교|경기대]] 폭풍을 이끌었던 구본왕까지 스카웃에 성공하며 보란 듯이 반격에 나섰지만... 이러한 LG화재의 꿈을 박살낸 일이 벌어졌으니, '''바로 그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삼성화재 배구단]]이 창단한 것이다.''' 삼성화재 배구단이 창설되고 그 이후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선..]] 사실 삼성화재는 [[김세진]]뿐만 아니라 구준회와 구본왕까지 노렸지만, LG화재는 구단의 해체까지 각오하고 저항하자 [[김세진]]만 삼성화재로 가는 걸로 합의하고 구준회와 구본왕은 남았다.[* 구준회는 그런 대로 활약했지만 구본왕은 부상으로 일찌감치 은퇴했다.] 여기에 삼성화재의 1993, 1994, 1995학번 핵심 자원 싹쓸이 파동 이후 이어진 배구계의 냉랭한 분위기 속에 다시 1999-2000 슈퍼리그 출전을 포기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LG화재는 김완식, 문병택, 이종만, 김재만 등을 강제 은퇴시키는 삽질을 저지른다. 물론 저 때 뿐만 아니라 5년 뒤인 2002년 이경수 파동으로도 LG화재는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이름부터가 [[이천수]]-[[이만수]]를 짬밥도 안 되게 하는 장수생라인이다.~~ 자유계약제였던 실업배구는 2000년부터 현재와 같은 드래프트제로 변경된다. 이는 모든 구단이 합의했다. 삼성화재는 창단 당시 스카웃전쟁에서 타 구단을 압도해버린터라 선수층이 두터웠고, 반대로 현대캐피탈이나 대한항공, LG화재는 스카웃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선수 수급에서 어려움을 겪어 평소에 뽑지 않았던 대학교에서 스카우트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당시 최대어인 이경수는 순위로 보면 대한항공에서 지명할 확률이 99.9%였으나 뜬금없이 드래프트가 열리기 전에 LG화재와 [[이경수]] 간의 영입계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같이 드래프트를 거부한 경희대 세터 황원식도 영입했다. 협회와 타 구단은 당연히 반발했고 그 여파로 LG화재는 2001-02 시즌 슈퍼리그에는 참가했지만 2002-03 시즌에는 아예 리그 자체 참가를 포기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선수가 손석범이다. 손석범은 이경수 파동으로 1년 반을 쉬고, 다시 늦은 나이의 공익요원 복무로 2년 넘게 쉬면서 예전 기량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우리캐피탈에 트레이드된 후 은퇴했다.] 나머지 98학번 선수들을 대상으로 드래프트는 실시되었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드래프트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지명을 받지 못한 홍익대 세터 원영철이 아무런 태클을 받지 않고 LG화재로 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경수 파동은 2003년 중반에 가서야 간신히 해결되어, 이경수와 황원식의 LG화재행을 인정하는 대신 프로 출범 후 치르는 첫 드래프트에서 LG화재가 행사할 1라운드 지명권을 [[대한항공]]에게 넘겨주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경수 파동은 이후 오랜 기간 이 팀을 짓누르는 짐이 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